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토쿠 덴노 (문단 편집) === [[호겐의 난]] === 교토에는 >'상황(스토쿠 덴노)이 좌부(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작당해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 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이 소문은 도쿠시와 타다미치 등 도바 상황의 측근들이 퍼뜨린 것이었다. 이 소문에 격노하여 고시라카와 덴노는 칙령을 내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그 부친의 영지에서는 '''모병을 금한다'''고 선포했다. 사실상 형 스토쿠 상황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칙령이었다. 이는 겉으로는 요리나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정말로 노리는 타겟은 스토쿠 상황이었다. 스토쿠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아들 시게히토 친왕도 대동하지 않고, 7월 9일 한밤중에 거처인 시라카와 후쿠덴을 빠져나가 교토 동쪽에 사는 여동생 무네코 내친왕의 저택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황급하게 도망쳤던지 《병범기》(兵範記)라는 책은 >"위아래가 어수선하여 친소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라고 서술했을 정도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결국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직접 반격을 결심했다. 7월 10일, 시라카와 후쿠덴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상경했으며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타이라노 이에히로, '''미나모토노 타메요시'''([[카와치 겐지]]의 수장), 타이라노 타다마사 등 스토쿠 상황의 측근들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고시라카와 덴노 측과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스토쿠 상황은 부족한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마지막 카드로 이세 헤이시의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생각했다. 키요모리는 아들 시게히토 친왕의 후견인이었고, 그의 계모가 시게히토 친왕의 유모인 이케노젠니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같은 아버지([[시라카와 덴노]])의 아들이니 형제이기도 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이세 헤이시 일족의 결속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스토쿠 상황쪽에 서도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세 헤이시 일족의 결속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키요모리 자신의 숙부였던 타이라노 타다마사는 이미 스토쿠 상황 편에 선 상황이었다.] '''고시라카와 덴노쪽에 붙었다!'''. 결국 7월 11일, 고시라카와 덴노 측의 군사들이 시라카와 후쿠덴을 공격해 스토쿠 상황 측을 격파하고, 시라카와 후쿠덴을 불태웠다. 7월 13일, 스토쿠 상황은 친동생인 카쿠쇼 법친왕에게 중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친동생도 형을 버렸다.''' 결국 미나모토노 시게나리에게 붙잡힌 스토쿠 상황은 암자에서 감시를 받다가 호위무사 수십 명의 감시속에 토바로 끌려가게 되었고, 배에 태워져 사누키로 유배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 동행한 사람은 총애하던 효에노스케노 츠보네와 궁녀 몇 명이 전부였다고 하며, 사누키로 유배된 후 8년 뒤 1164년에 붕어했다고 한다. 사망의 사유에 대해서는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인 고시라카와 덴노가 사람을 보내 암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